Commons

[인터뷰] 김원영 변호사 "장애인은 문화의 감상자를 넘어 창작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이 미술관에 가지 못하는 건 정말 당연한 걸까요? 2021년의 접근성은 20년 전과 달라야 합니다

코드 매니저 김수향 2021년 06월 21일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저는 김원영입니다. 법무법인 덕수에 소속된 변호사이고 공연을 좋아하고 장애인 차별, 인권, 예술 쪽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다방면으로 활동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B학점인 사람입니다.

춤과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

처음 시작은 연극이었고요. 저는 중학교 때 장애 학생들이 모여있는 특수학교를 다녔어요.. 제가 다니던 특수학교에 놀러오는 자원봉사로 오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연극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전까지는 사람들 앞에서 뭘 해본 적도 없고 제가 그런 것을 좋아하거나 할 수 있다는 상상도 못했는데, 작은 규모였지만 그 친구들과 함께 연극 공연을 만든 그 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마음에 남아있었죠.

고등학교는 일반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사실 일반 학교에 가도 그런 기회는 없었어요. 제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당장 학교 건물에 접근이 안 되는 문제가 있어서 학생들이 모여 장애학생 교육권에 관한 싸움을 했어요. 꼭 해야 하는 싸움이었고, 그런 활동을 하느라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계속 마음 속에는 공연에 대한, 무대에 대한 기억이 계속 있었어요. 잊고 공부나 계속 해야지 하다가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계속 있었어요. 대학원에 가서 잠깐 휴학하고 총연극회에 소속된 친구들, 그리고 제가 특수학교에 있었을 때 만난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공연 팀을 만들어 학교에서 공연을 했죠. 1년짜리 프로젝트였는데 저는 출연하지 않고 공연기획을 했어요. 그후 공연팀이 계속 이어져 제가 출연하는 공연도 하게 되었고,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2016년 쯤에 장애인 무용 워크샵이라는 게 한국에서 열렸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연극을 하는 분들은 많았는데 무용, 춤의 경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어요. 휠체어 댄스라고 해서 테크닉 묘기를 부리는 특정한 장르는 있었어요. 그것도 멋지긴 했지만 저는 휠체어를 가지고 발휘하는 테크닉보다는 저의 몸 자체, 신체 감각을 가지고 하는 무용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춤을 추겠다는 생각까지는 못했고, 대신 대사나 내러티브보다 움직임이 좀더 많은 연극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무용 워크샵에 참여해서 처음으로 휠체어 아래로 내려와서 움직이는 동작을 했거든요. 참여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런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고 저에게 굉장한 해방감을 줬어요. 제 몸의 특성상 저는 휠체어 없이도 잘 움직이는 사람이거든요. 연극을 할 때도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도 당연히 (휠체어에서) 내려오는 건 상상할 수 없죠. 왜냐하면 기어다니는 건 문명화된 움직임이 아니잖아요. 문명화된 인간은 기본적으로 직립보행을 해야하는 것이고, 장애인이라고 해도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죠. 그런데 워크샵에서 뭔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휠체어에서 내려올 수 있었어요.

바닥으로 내려오는 장면에서 거의 처음으로 사람들이 있는 공적인 공간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나의 방식으로 처음 움직여본 거예요. 그 즈음 우리나라에도 장애인 연극뿐 아니라 장애 무용이라는 것도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관련 창작자들이 많이 생겨났어요. 이제는 비장애 무용수 분들이 장애인 분들과 함께 작업하는 경우도 있고, 장애가 있는 분들이 무용수로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근래들어 많이 늘었거든요. 그런데 그때가 변화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어서 저는 이미 연극도 좋아하고 있었지만, 사실 제가 더 좋아했던 건 연기보다는 몸의 움직임을 가지고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나는 춤을 좋아하고,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 뒤로는 아예 무용 공연을 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합니다. 워크샵이 열리면 많이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동보조기기 전문기업 토도웍스(todoworks)의 홍보영상에 등장한 김원영 변호사]

저서인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인을 사이보그로 정의한 이유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결합한 기계’라고 정의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SF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최첨단의 무엇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만 사이보그인 게 아니에요. 늘 전동휠체어 라고 하는 기계와 제 몸이 하나로 움직이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사이보그적인 존재이죠. 모든 사람에게 스마트폰은 긴밀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게 스마트폰은 각종 문자를 음성정보로 바꿔주는 중요한 기기이니까 더 긴밀하겠죠. 그런 점에서 저를 비롯한 많은 장애인들이 사이보그적인 존재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이보그란 개념 자체가 미래에 생겨날 엄청난 무엇이 아니에요. 우리가 마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아이언맨 슈트를 꼭 입어야만 사이보그가 아니고, 휠체어나 아주 단순한 형태의 의족이라도 착용하고 있고, 그것과 내 신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시간을 보낸다면 그런 존재가 사이보그적인 삶의 방식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에서의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문제점

1차적으로 향유하는 데에 접근성 문제가 있어요.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내가 공연장에 가고 싶은데 객석이 있는가', '미술관에 가고 싶은데 미술관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가'입니다. 이게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들이죠.

사실 이 부분은 그동안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비롯한 여러 노력들을 통해 많이 바뀌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휠체어 관람석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로 가보면 휠체어 관람석 옆에는 의자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저와 같이 간 사람이 반드시 휠체어를 타는 사람인 건 아닌데, 그럼 저와 함께 간 그 사람은 제 옆에 앉지 못하는 거죠. 그 사람은 앞쪽에 앉고 뒤에 나 혼자 앉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이런 예가 아직도 존재합니다.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소극장 같은 곳은 여전히 접근이 안 되는 곳이 많아요.

소극장들은 규모가 작다보니 법적인 의무에서 면제되는 곳도 많거든요. 이해할 만한 사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현실적으로는 소극장 접근이 어려워요. 미술관의 경우, 큰 국공립 미술관은 대체로 이용할 수 있지만 작은 갤러리들은 접근이 많이 어렵죠.

교육이나 고용이나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이슈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갤러리 접근성을 얘기하는 게 어떻게 보면 좀 한가해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이런 공간에 갈 수 있냐 없냐가 던지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봅니다. 그런 공간이 당장의 생존과 기본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누군가가 고심해서 만들어낸 문화 콘텐츠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다면 생활 속 다른 영역에서의 접근성에 대한 필요가 더욱 눈에 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얘기한 것은 가장 상상하기 쉬운 접근성, 물리적 접근성의 예입니다. 물론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건 2000년대의 문제의식인 것 같고, 적어도 2021년 쯤 되면 우리가 직면한 고민은 이런 거죠. ‘시각 장애인이 미술관에 가지 못할 이유는 뭘까’,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작품을 즐길 수 있을까’ 실제로 이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도 어떤 작가님의 작업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해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하는 행사인데 '보이지 않는 조각'이라는 테마에요. 헤드셋을 쓰고 어떤 공간을 만지고, 어떤 지점에 갔을 때 소리가 더 두껍게 들리고 크게 들리고 작게 들리고 해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조형물이 아니어도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상상할 수 있는 거죠.

온도로 표현하는 작품도 있어요. 어떤 지점이 상대적으로 뜨거운 질감이 더 강한 부분이면 내가 상상할 수 있잖아요. 또는 어떤 조형을 전시하는데 시각 장애인이 만질 수 있도록 전시하는 거죠. 휠체어가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건 20년 전 고민이고, 2021년에 사는 우리들의 고민은 이런 식으로 ‘청각 장애인이 음악을 즐기기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음악을 즐길 수 있을까’와 같은 고민들을 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여기까지는 ‘향유’의 문제이고, ‘창작'의 문제는 또 다릅니다. 이건 '내가 창작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술의 전당이라는, 한국의 굉장히 큰 공공 공연장 객석에는 휠체어석이 마련되어있죠. 하지만 과연 그 곳의 분장실과 무대를 장애를 가진 창작자가 쓸 수 있느냐고 물어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장애인이 창작의 주체로서 문화예술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얼마나 다양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표현하는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가. 이것도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우리 시대의 접근성 이슈인거죠. 저는 지금은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요. 이런 부분들이 활발하게 열려야만 많은 창작자가 나오지 않겠어요?

교육도 마찬가지죠. 예전에는 시각장애인이면 대학에 들어가기 어려웠죠. 그렇지만 세상이 좀 변하면서 이제 음대에서 시각장애인 학생을 받고 청각장애인 학생들이 미대에 입학했어요. 좋은 변화죠.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의 고민은 이런 겁니다.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미대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다면 왜인가. 제가 지금 19살이라고 가정하면 예술대학의 무용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들어갈 수 없다면 왜인가.

음대에서 시각장애인을 입학시키지 않으면 지금의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이라는 게 거의 명확해요. 암암리에 많은 차별이 있겠지만, 어느 시각 장애인 피아니스트를 음대에서 받지 않는다면 이건 차별이죠. 아마 모든 분들이 여기에 별 문제의식을 안 느낄 거예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가 왜 음대에 갈 수 없을까?' 음대에서 요구하는 실력과 조건을 갖추었다면 당연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그렇지만 지금은 걸을 수 없는 고등학생이 어떤 예술대학 무용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인가, 당연하다면 왜 당연한가, 이런 걸 묻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들어갈 수 있어야 된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그리고 일단 입학을 한다고 해도 모든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된다고 하면 그것도 의미가 없죠.

다양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창작자로 등장할 수 있고 이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연습실이나 공연장 이런 것들이 많아질 때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여러 문화 콘텐츠도 훨씬 더 확장 되겠죠.
관객으로서의 접근성과 창작자로서의 접근성 문제가 있었다면 지금은 창작으로서의 접근성이 중요하게 얘기될 때인 것 같아요.

언택트 시대의 접근성

제 주변에 장애가 있는 친구들 혹은 학생 분들은 팬데믹으로 인한 언택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에너지가 너무 크고 체력적인 부담도 많은데 온라인 수업을 하니까 너무 좋은 거죠.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할 수도 있고 또 학교에 대한 접근성이 완벽하지도 않은데 집에서 하니까 참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보면 아마 삶의 질이 올라가는 사람들 분명히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언택트라고 해서 접근성 문제가 없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이를테면 시각 장애인 교사분들의 경우에는 언택트 상황에서 각종 프로그램들이 시각 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물론 어떻게든 헤쳐나가고 잘 적응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초반에는 그게 엄청난 장벽이 됐죠.

우리가 하나의 감각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직접 마주하게 되면 다른 (감각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체계라는 것은 총체적인 거잖아요. 직접 만났을 때는 (스크린을 통해 얻어지는) 시각 정보 외에도 훨씬 더 풍성한 정보를 습득할 수있는 거죠. 그런데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이런 언택트 상태를 통해 참여 기회를 얻은 분들도 있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더 많은 제약이 됩니다. 나이드신 분들도 그런 제약을 겪는 분들이구요. 따라서 언택트 상황이 전반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성 높여주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메타버스에서 갖고 싶은 캐릭터는?

1차적으로는 지금의 저와는 완전히 다른 외형과 개성과 히스토리를 가진 캐릭터를 가져보고 싶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장애가 있는 캐릭터를 메타버스에 등장시켜 보고 싶기도 하죠. 휠체어를 탄 모양만 가지는 것 말고 진짜 거기서 뭘 못 하는 캐릭터인 거예요. 가령 어떤 공간이 백화점이라고 해 볼게요. 상점도 있고 그 안에 각종 상품들도 갖춰져 있고 판매하는 매니저들도 있겠죠. 그런데 어떤 캐릭터는 백화점 2층에 못 올라가는 거예요. 어떤 노력을 해야만 올라갈 수 있는 거죠. 그런 캐릭터가 나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요. 실제로 거기 접속한 많은 사람들이 추가적인 노력을 해야지만 백화점을 전부 이용할 수 있는 거죠. 미리 설계된 캐릭터라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일종의 오류로 등장하는 겁니다. 정말로 그 세계에서 뭔가를 할 수 없는 캐릭터.

약간의 버그를 수정했더니 해결된다고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현실세계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백화점 2층에 접근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들어가잖아요. 그런 식으로 메타버스 공간에서도 어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2층에 접근할 수 있는 캐릭터. 현실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등장했듯이 메타버스 공간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상상을 해보는 거죠. 그런데 이런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죠?(웃음)

장애 관련 법에서 아쉬운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20년 전부터 장애인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결과가 다 입법으로 나타났어요. 운동의 결과물이 대체로 입법 운동으로 끝났어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차별금지법을 만든다, 장애인 창작자들이 접근이 안되면 문화예술진흥법에 장애인 관련 조항을 넣는다,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교통 약자 이동증진법을 만든다, 이런 식으로 정말 많은 법이 생겼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법들만 보면 나쁘지 않은 상태에 있죠. 지금도 많은 입법 운동들이 있지만, 워낙 급하게 만들어지다 보니까 현실의 디테일한 부분과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매우 많아요. 특히 위임 입법을 통해 정부가 법을 구체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과정에서 입법취지가 사라지는 경우도 많아요.

의회가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그냥 도덕적으로 잘 받아 주고 있을 뿐, 실질적인 책임을 잘 안 지는 것 같습니다. 큰 틀에서는 이렇고, 실생활에서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장애인관람석 규정이 있잖아요. 영화관이나 공연장에 휠체어 관람석은 어떤 사이즈로 하고 어떻게 만들어라 하는 규정이 있거든요. 앞이 비어있으면 안전바를 설치하라는 규정이 있어요. 그런데 그 규정만 있을 때 어떤 공연장들은 규정을 잘 지켜서 안전바를 놓지만 실제로 안전바가 높아서 휠체어석에서 무대가 안 보여요. 공연을 보러 온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 안전바를 설치하라고 한 건데 앞을 가리는 안전바는 설치해도 의미가 없잖아요. 모든 걸 다 너무 상세하게 규정을 해 주지 않으면 실무에서 그 취지를 지키지 않으니까 일일이 규정을 해 줘야 되고 그렇게 규정을 만들면 유연성이 떨어지니 다른 조건에서는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이 발생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법을 만드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현장과 상황에서 법의 취지를 어떻게 잘 구현할 것인가 하는 지혜가 축적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규정은 현실적인 구현이 제대로 안되어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법률가가 된 이유, 미래에 어떤 법률가가 되고 싶은지?

제 주변에는 법률 전문가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지키거나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컸어요. 지금은 연구의 영역에서 법률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실무적으로는 평범한 변호사가 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구요. 공익 변론과 같은 것을 하지 않더라도 특정한 법률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예술인으로서의 목표는?

엄청 대단한 창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보다는 창작자로서 당장 앞둔 공연을 잘 만드는 것이고요.

무용의 이야기가 포함된 단행본이 올해 말에 나오거든요. 그 책의 내용이 인간의 몸과 공연, 차별과 평등에 관한 관념 이런 얘기에요. 제가 항상 갖고 있는 과제는 분절된 경험과 지식들을 통합하는 거예요. 그렇게 통합해서 제가 저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합니다.

cover


인터뷰일: 2021.05.12
인터뷰진행자: 김수향, 이유미
편집: 김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