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통령인 내 자신이 솔선해서 국민의 앞에 서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위 발언은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 27일에 본인의 재산 내역을 공개하며 했던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단연 ‘공개.'
공직자 재산 등록 제도는 1981년에 공직자윤리법으로 법제화 됐지만 공개 의무는 빠져있어서 반쪽자리 제도에 불과했다. 신고한 재산은 특정 목적 이외에는 비공개가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허술하게 만든 제도에는 빈틈이 많았고 이를 악용한 공직자들의 불법 재산 증식은 골칫거리가 됐다. 이는 조선일보의 1984년 6월 27일 자 '모 호한 公職者(공직자) 財産(재산)등록' 사설에서도 등록 시에 기재한 재산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며 재산을 감춰서 불법한 비리를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런 허점을 고치기 위해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이틀 만에 투명한 ‘공개'를 약속했고 국회 역시 발 빠르게 공직자윤리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했다. 누구나 매년 공직자들의 재산 내역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1993년 9월 6일 사상 첫 공직자 재산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근데 왜 PDF로 공개하나요?”
고위공직자 재산 내역은 올해도 어김없이 PDF로 공개됐다. 분류별 재산 항목, 상세 내역, 금액 등이 상세히 나와있지만 1993년에 처음 공개했던 공개 방식과 큰 차이는 없다. 공직자윤리법에 근거해서 관보로 공개하고 있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PDF란 파일 형식이다. 여기서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 왜 PDF로 공개하는 것일까?
PDF는 텍스트를 읽고 수정하기 위한 용도라서 재산의 증감을 파악하고 분류별 재산 내역을 모두 살펴보기는 어렵다. 수 천명의 공직자 재산을 전수 분석하기에는 적합한 파일 형식이 아니란 뜻이다.
가령 재산 내역 PDF에는 공직자가 보유한 부동산 현재가액이 나와있다. PDF 파일 특성상 사람은 읽고 보기 편하겠지만 다주택자 검증 혹은 개별 공직자들의 토지 보유 금액과 같이 자세한 재산 내역을 산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언론에서도 보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통계(평균, 증감 등)만 인용할 수 있을 뿐 재산 내역을 전수 분석하고 불법성과 꼼수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냥 엑셀로 주시면 안되나요?”
2019년 정기재산공개 기자 간담회에서 나온 질문이다. 공직자 재산 내역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한 번쯤 떠올렸을 물음표다. 공직 감시가 의무인 언론에서 공직자 재산 전수 분석을 하려면 PDF가 아닌 엑셀이나 CSV(comma seperated value)와 같은 파일 형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 기자는 로우데이터 형식을 요구한 건데 인사혁신처의 답은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엑셀로 공개해야 한다는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PDF로 공개해야 한다는 근거도 없다. 참고로 공직자윤리법 제 10조(등록재산의 공개)에는 ‘관보 또는 공보에 게재하여 공개하여야 한다’라고만 나와있다. 파일 형식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어떤 형식으로 공개할 것인지는 공직자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 투명한 공개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엑셀로 공개하면 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2021년이면 공직자 재산 공개제도가 시행된 지 30년째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반가운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PDF가 엑셀로 변환되기까지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정부, 대법원, 국회,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개한 재산 내역 PDF 전수를 CSV형태로 변환하기 위해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정부에서 엑셀(CSV)로 주지 않으니 자체적으로 변환할 수밖에 없었다.
마부작침은 다양한 시도 끝에 Adobe Acrobat으로 PDF를 html 파일로 변환 후에 크롤링 기법으로 PDF표를 해체하고 데이터를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R프로그래밍의 도움을 받았다. 재산 내역 PDF를 개발한 코드에 넣으면 PDF를 엑셀로 변환해서 아래 그림과 같은 엑셀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게 된다. 정부에서 당일 오전 9시에 재산 내역을 공개하면 30분 이내에 엑셀로 변환된 파일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뉴스타파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재산을 변환해서 공개하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전체 데이터를 엑셀과 같은 데이터베이스 형식으로 변환하면 다양하고 심층적인 재산 분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지난 10월에 보도된 마부작침의 지방의원 재산 분석 기사가 대표적이다.
지방 의원들이 보유한 농지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 농지로 대표되는 논, 밭, 과수원 내역만 추출해서 분석하고 농지법 위반 불법성을 따질 때 용이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도권 다주택자, 비상장 주식 보유 등 문제가 될만한 재산 내역을 분석하고 탐색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심사 결과도 공개할 때…
3년째 공직자 재산 분석을 하다 보니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신고한 재산에는 거짓이 없을까?’ 공직자들이 재산을 누락하거나 엉뚱한 내역을 신고할 가능성은 없지 않다. 인사혁신처 소청 내역을 검색해보면 실제로 재산을 누락하거나 허위 신고해서 처분을 받은 내역이 많았다.
이런 허술한 점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사혁신처 재산심사과는 재산의 누락과 허위 신고를 검증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재산 내역은 의무 공개인데 심사 내역은 비공개란 점이 쉽게 이해되진 않는다. 이 역시 공직자윤리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공개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마부작침은 1년간 인사혁신처와의 줄다리기 끝에 지난 5년 치 재산 심사 결과를 정보공개청구로 획득해 문제점을 보도했다. 생각보다 많은 공직자들이 경고 이상의 무거운 처분을 받고 있었다.
재산 공개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심사 결과까지 공개할 필요성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투명한 공직 사회를 위한 갈 길이 여전히 멀다.
다음 과제는 협업
내년에도 정부는 공직자 재산을 PDF로 공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내년에도 PDF를 강제 변환해서 재산 내역을 분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수 언론사들이 비슷한 변환 방법을 고민하거나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변환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꼭 해야만 할까?
아직 국내에서는 익숙한 방식이 아니지만 감히 ‘협업'을 제안해본다. 재산 변환을 함께 하고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이다. 재산 변환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고 확인 절차도 필요하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협업을 통해 재산 내역 PDF를 변환해서 투명하게 공개하고 활용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