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ons

팬데믹 시대의 ‘우리’ 되기

현재의 위기 국면은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상대방이 지침을 따를 것으로 기대할 수 밖에 없는 모순적인 일을 수행하도록 만든다

E Editorial Team 2020년 05월 29일

[글쓴이: 권범철, 예술과 도시문화 연구소 연구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가 여전하다. 이 전 지구적인 바이러스 사태는 단순히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아주 기초적인 형태부터 뒤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전례 없는 위기로 다가온다. 이 위기의 특이한 지점은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면서도 ‘함께’ 행동할 것을 강하게 — 각종 행동 지침은 함께 따를 때만 효과가 있으므로 — 요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잠재적 보균자인 상대방을 의심하면서도 그가 예방 지침을 따를 것이라고 어느정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기대가 전혀 없다면 사회적인 활동이란 것은 아예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즉 현재의 위기 국면은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일을 수행하도록 만든다.

또한 스스로도 (어떤 이유에서건)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려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우리’가 되는 것일까? 이 ‘우리’라는 말은 모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말은 한편으로는 ‘나’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포용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계를 긋는다는 점에서 배타적이다. 현재의 위기 국면에서 타자와 차이에 배타적이지 않고 열려 있는 ‘우리’는 가능한가? 이 문제는 중요하다. 사회의 변화는 우리가 그 낯선 것들과 얼마나 연결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얼마나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는 여기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그들은 존재를 그것의 내적 속성이 아니라 무리 속에서 사고한다. “늑대는 무엇보다 하나 또는 몇몇 특성이 아니라 늑대 무리”다. 동물이 무리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들은 계통 관계와 전염병을, 유전과 전염을, 유성 생식이나 성적 생산과 전염을 통한 서식을 대립시킨다. 인간 패거리이건 동물 패거리이건 상관없이 모든 패거리들은 전염, 전염병, 전쟁터, 파국과 더불어 증식한다. 흡혈귀는 계통적으로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어 가는 것이다. 전염이나 전염병은 예컨대 인간, 동물, 박테리아, 바이러스, 분자, 미생물 등 완전히 이질적인 항들을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이들은 여기서 전염을 '되기(=생성)'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동물은 무리이며, 무리는 전염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하며 변형된다.” 다시 말하면 전염은 동일성을 담보하면서 이어지는 계통 관계가 아니라 이질적인 항들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집합적 주체를 생성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팬데믹 시대에 이 전염을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해해 보자.

‘우리’라는 벽과 바이러스라는 적

우선 전염에 의해 어떤 무리가 형성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바이러스가 그 어느때보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우리’는 복잡한 측면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우리’는 어떤 두려움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두려움은, 정작 바이러스 자체는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한을 인격화된 바이러스에게 쏟아낸다.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인격화된 바이러스는 중국인, 신천지 교인, 성소수자의 순서로 모습을 달리했다. 이들은 사회를 ‘오염’시키는 적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니며 입국을 금지시키거나 추방하거나, 교화하거나, 심지어 ‘치료’해야하는 외부자들이다. 이때 ‘우리’는 그 안에 속한다고 여기는 나의 안전을 위한 배타적인 장벽으로 출현한다. 의심과 공포는 혐오를 퍼뜨리고 그 감정에 전염된 우리는 배타적인 무리로 변형된다. 이 ‘우리’ 되기는 소수자를 배제하고 갇힌 무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지배 질서를 강화할 뿐이다.

여러 매체에서 다룬 혐오의 문제를 여기서 다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를 ‘싸워서 퇴치해야 할 적’으로 설정하는 문제다. 우리의 적은 바이러스인가? 바이러스를 적으로 상정하면 그것이 제기하는 복잡한 문제들은 논의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바이러스를 다루는 논의는 그것을 우리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속한 것으로 설정해야 한다. 피터 마르쿠제의 말을 바꿔서 표현하면, 이 바이러스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올바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난, 불평등, 기후 위기 등 많은 문제들이 그러하듯이. 아직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19를 생태 교란과 서식지 파괴로 인한 인수 공통 감염병의 일종으로 파악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생태 교란은 자연을 외부로 설정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서 이 바이러스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은 인격화된 바이러스도, 바이러스 자체도 아니다. 우리가 문제화해야하는 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해 온 그 시스템, 그것의 경제 관계다. 그리고 카펜치스의 말처럼 이 사회에서 경제 관계는 권력 관계이며 그래서 정치적 관계다. 그러므로 이 바이러스는 단순히 백신을 개발하면 끝나는 문제도 아니고, 기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바이러스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의 장에, 다시 말해서 여러 사회 세력들이 만나는 세력장(force fields)에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제기하는 문제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몰랐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문제들이다. 바이러스는 그동안 사회에서 비가시화되고 주변화되었던 문제를 들춰낸다. 외국인 혹은 동성애 혐오도, 젠더화된 돌봄 노동의 위기도, ‘아파도 일해야 하는’ 노동 환경도, 그리고 생태 위기도 모두 이 바이러스 위기 이전부터 있던 문제다. 수면 아래 잠재해 있던 것들이 위기 국면에 문제화된다. 위기는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위기 이전부터 잠재해 있던 문제들은 위기를 만나 심화되고 그 위기를 다시 증폭시킨다(예컨대 혐오를 피하기 위해 검사를 기피하는 소수자의 경우).

그렇다면 이 문제를 이제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자본주의적 시장 관계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공적인 것의 회복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사유화로 인해 취약해진 공공 의료 시스템이 사망자 수 급증에 큰 책임이 있다는 분석은 이에 힘을 더한다. 그러나 공적인 것으로의 회귀는 그것의 관리자로 설정되는 국가 권력의 강화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감염자 추적, 이동 제한 등과 관련한 빅브라더와 권위주의의 강화는 이미 중요한 문제다. 또한 국가가 바이러스 대응에서 큰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국가만으로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국가와 바이러스는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공적인 것도 사적인 것도 아닌 공통적인 것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된다.

‘우리’라는 연대

공포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과는 달리 능동적인 연대의 감각으로 형성되는 ‘우리’가 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연대하는 ‘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협력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건축가이자 커먼즈 연구자인 스타브로스 스타브라이스(Stavros Stavrides)는 팬데믹 위기의 맥락에서 생존을 위한 집합적인 노력과 상호부조의 전통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이 수렴하여 커먼즈가 출현한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많은 자원(volunteer) 공동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슬럼과 브라질의 파벨라(favela)에서 사람들은 마스크를 함께 생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요리를 하는 집단 부엌이 아테네, 산티아고, 리우 등에서 출현했고,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MST) 활동가들은 치료용 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해 카샤사(브라질산 럼주) 양조장을 개조했다.

이들이 보여 주는 것은 함께할 수 있는 능력 혹은 함께함으로 인한 능력이다. 커먼즈는 바로 공통인(commoner)들의 이러한 능력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말처럼 “빵 굽는 사람이 빵을 굽고, 옷감 짜는 사람이 옷감을 짜고, 방아 돌리는 사람이 방아를 돌리는 것과 똑같이, 공통인은 “공통한다(commons)”. 즉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것은 재화나 서비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 사례에서 공통인들은 마스크와 음식, 알코올 같은 재화뿐 아니라 그들 자신을 고립된 개인을 넘어선 더 큰 네트워크의 일부로, 즉 커먼즈의 일부로 생산한다. 다시 말해서 공통인은 주어진 정체성이 아니라 공통하기의 과정에서 생성된다. 공통인이 있어서 공통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하기의 과정이 공통인을 만들어 낸다. 즉 공통인으로 ‘전염되어’ 간다. 이렇게 공통화와 주체화의 과정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그 과정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공통할 수 있는 능력에서 공통하기가 나오고 거기서 공통 체계, 즉 커먼즈가 나온다. 노동이 수행되기 위해 노동력이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처럼 공통하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떤 면에서 현재의 위기는 그 능력의 배양을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타브라이스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연대 활동들이 출현한 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식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구해내지 않으면 희생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위기 속에서 상호 부조 네트워크가 출현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리베카 솔닛이 자신의 책, 『지옥에 세워진 낙원』 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람들은 재난 속에서 오히려 사랑과 연대 의식을 경험한다. 페레리치의 말처럼 공통하기는 우리의 존재 조건으로서 계속해서 재창조되는 것이다.

한편 이 위기는 재생산 노동이 사회의 필수 영역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 음식을 준비하는 일, 혹은 그것을 배달하는 일 등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 즉 재생산 노동은 모든 사회가 기능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다른 모든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재생산 노동이다. 그러나 지금의 바이러스는 재생산 노동이 필수적이라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낸다. 신자유주의 사유화와 더불어 재생산 영역은 직접적인 축적의 지점이 되었고 그에 따라 취약해진 보건, 돌봄 등의 영역은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해당 노동자들의 ‘헌신’, 즉 과로에, 혹은 성차별화된 부담(가족 내에서 ‘여성의 일’이 되는 돌봄)에 기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다시 공적인 것의 복원을 요구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일이겠지만, 국가를 다시 불러낼 때에도 그것을 공통적인 것과의 연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생산한 부를 재전유하는 일이다.

바이러스와 우리

현재의 위기는 우리를 이전과는 다르게 살도록 강제한다. 마스크를 쓰는 아주 소극적인 행동부터 이웃을 위해 도시락을 만들어 배달하는 능동적인 모습까지, 이 행동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강하게 일깨운다. 늑대가 무엇보다 늑대 무리인 것처럼 ‘나’는 무엇보다 ‘우리’로 있다. 나만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성립하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라는 모호한 집합적 주체도 변화를 겪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 가족만, 우리 학교만, 우리 회사만, 우리 나라만 안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는 중이다. 우리는 좀 더 다른 존재가 되고 있는 중일까?

어쨌든 바이러스는 우리가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것이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문제들을 끄집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특정한 조건에서만 바이러스가 된다. 동물의 몸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그 기생체는 자본이 생산한 생태 위기 속에서 인간에게 왔고, 그제서야 (인간의 관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진짜’ 바이러스가 되었으며, 바이러스와 무관하게 이미 현 사회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생산해 온 여러 문제들 — 불평등, 열악한 노동 조건, 재생산 노동의 위기 등 — 과 결합하여 위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그 바이러스가 위기로 작동하기에 최적화된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이 위기의 진원은 바이러스라기보다 ‘우리’고, 정말로 재난적인 상황은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작동해 온 그 사회로 돌아가는 일이다. 자연에, 타자에 눈을 감고 작동해 온 그 사회 말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다른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선택의 문제를 이미 벗어난 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은 차이와 공통할 수 있는 감각의 전염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Cover image: United Nations COVID-19 Response

cover